Ⅰ. 식민과 식민치하
일본은 봉건 국가에서 출현했으나 한국은 농업-행정주의 국가였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19세기 이전에는 농업의 상업화가 널리 발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중국보다 더 강력한, 땅을 소유한 향신층이 있었다. 또한 일본과는 달리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경쟁에 의한 이익이나 도시
식민주의적 열강을 모방을 통해 강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 발현된 식민지의 지배전략으로 일본 내에서 근대화와 서구 문명화가 식민주의에서 보편적 명제로 출현했으며, 그 희생양으로 조선은 단계적 침탈과정을 거쳐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가 된 조선은 일제의 식민주의인 ‘민족말
1.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아편전쟁
배경 : 세계의 근대화 물결, 서양 식민주의 세력
영국 선박의 청나라 침략
1842년 난징 조약의 체결
난징조약 : 홍콩 약탈, 2100만냥의 은
▼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전락
양무운동
배경 :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원명원 침략
함풍황제의 서양 선진기
식민주의를 치진하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한국의 경우 이러한 외부적 충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반식민지 상태로 전략해 버림으로서 근대화의 노력은 좌절을 맞고 말았는데 반해,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던 일본의 경우 자주적인 근대화에 성공하
근대화의 기본 동력으로 주목하였으며, 일제의 침략 만행과 야만적 수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내재적 발전론
내재적 발전론이란 식민주의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대두한 이론이다. 즉 한국사는 타율에 의해 움직여 온 역사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내재적으로 움직
식민주의를 자행하는 일본을 상징
(3)아끼꼬 호미 바바에 따르면, 아끼꼬는 피지배 문화의 잡종성을 나타내는 인물로 신식민지에 저항적인 모습을 보인다.
호미 바바는 피지배 문화의 잡종성에서 식민지 담론의 극복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은 피식민지인들
식민주의 사관의 핵심 이론중 하나인 ‘정체성 이론’은, 우리민족은 논농사를 하는 시회였고, 지방분권적 봉건 제도가 없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 될 수 없었으며, 자기네들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는데 큰 선도를 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학문적 근거가 전혀
근대화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특히 사절단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국제적 규모의 출품전시 이벤트인 만국박람회를 관람하였다. 이들의 관람은 훗날 일본에 최초의 근대 박람회가 개최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1. 근대 일본의 박람회를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관련지어 서술, 2. ‘태
식민주의사관>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원리인 인간해방과 인간성의 향상, 그리고 국제평화의 개념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 … 중 략 … ≫
Ⅱ. 일제역사(일제강점기역사)와 식민지근대화론
1.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
역사학계의 식민지 시기 연구 경향은 대체로 원시적 수탈론, 근대
제1장 왜 지금 제국주의인가
제국주의의 결과는 과거와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의 대단한 것이었다. 열강들의 식민지 반환과 민족주의로 인한 식민지 독립이 20세기 후에 이루어졌지만 식민주의적 지배, 제국주의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피지배자 국가들에게 언어,